대한소화기학회 윤리위원회에서 보내는 소화기 생각(2019년 4호)
안락사의 실제 적용 및 연명의료 중단과의 차이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박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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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소화기 생각에서 안락사의 기본 개념 및 분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류를 하여도 실제 의료 현장에서 명확하게 판단하여 정확하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령 급식 튜브를 제거하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지만, 급식 튜브를 그대로 둔 채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것은 흔히 소극적 안락사로 인식됩니다. 여기서 결과는 같은데 단지 튜브를 빼거나 두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의 경우에도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한 환자가 심폐소생술로 소생한 다음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이 과연 비자발적 안락사로 불릴 수 있는지 애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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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실제 상황에서 안락사에 관한 윤리적 상황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안락사에 관한 세계의사회(World Medical Association, WMA)의 결의에 담긴 근본정신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난 2005년 제 170차 WMA Council Session에서는 다음과 같은 안락사에 대한 결의안이 표명되었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종결시키는 행위인 안락사는 환자 자신이나 그 가까운 친척들의 요청이 있을 때라도 비윤리적이다. 이는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적인 죽음의 과정을 수락하는 환자의 원의를 의사가 존중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울러 같은 회기에서 WMA는 의사조력 자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습니 다: “의사조력자살은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비윤리적이며 의료인들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한다. 의사의 조력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한 개인이 그의 삶을 종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 의료인의 행위들은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의료적 처치를 거절 하는 것은 환자의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이고, 비록 결과적으로 환자의 죽음에 이를 때라도 환자의 그런 권리를 존중해 주는 의사의 행위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과 의사와 환자 간의 전통적인 신뢰 관계입니다. 즉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사람이지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기본 전제가 의사-환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발점입니다. 최근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속속 등장한다 하더라도, 이 기본적인 신뢰를 허무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단죄하는 WMA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신뢰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결의를 담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가 아니라 과도한 의료적 간섭을 피함으로써 존엄하고 순리적인 죽음을 허용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안락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연명의료 중단에는 환자의 동의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대리 결정의 경우에도 환자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충분히치료가 가능하고 환자도 치료에 대한 의지가 있지만 치료 비용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안락사라는 명목으로 환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는 의료인으로서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의사는 생명의 존엄성을 그 존재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들입니다. 생명의 마감에 대한 결정 과정에서 가능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 존재 기반을 지켜가는데 결코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부디 의료인들은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과 안락사를 분명히 구별하고, 이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계속 유지해나가기 바랍니다.